민속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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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산문화원 댓글 0건 조회 461회 작성일 19-10-17 12:36본문
민속 연희의 전통은 마산이 예향의 전통을 가진 도시라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 1. 동제(洞祭)
동제는 동우제(洞虞祭)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민간 신앙으로 대체로 정월 대보름에 지냈다. 동제는 한 마을을 중심으로 주민 전체가 제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하여 제물을 마련하고, 제관을 뽑고, 공동의 금기를 지키며, 마을 공동의 평안과 행복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제관은 40대 이상의 남자로, 집안에 부정(不淨)-산고(産故), 태기(胎氣), 해산(解産)-이 없는 사람으로 뽑았다. 뽑힌 제관은 제를 올리기 전 일정 기간 대문에다 금줄을 치고 치성을 드렸다.
그리고 마을의 당목(堂木)에도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그 곳에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제사 당일날은 제단에 제물을 올리고 분향(焚香)· 참신(參神)· 헌작(纖酌)· 독축(讀祝)· 재배(再拜) 등의 순서를 거쳐 마을의 호수대로 소지(燒紙) 축원을 했다. 이러한 절차가 끝나게 되면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음복(飮福)을 하고, 농악놀이를 하며 흥겨운 잔치마당을 펼쳤다. 이때 동제에서 모시는 대상 신들은 마을마다 조금씩 차이가 났다.
그 중 당산제는 마을 주변의 산에 신당(神堂)을 짓거나, 크고 오래된 나무 아래에 바위를 신단(神壇)으로 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마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신당은, 마산시 추산동 산 1번지에 있는 산제당(山祭堂)을 들 수 있다. 사당은 2평 정도 되고, 그 안에 좌불상 1폭과 산신도 1폭이 있어서 치성을 드리도록 되어 있다.
이 제당은 3백년 내지 4백년 전에 지었다고 전해지며, 이곳에는 주로 부녀자들이 들려 자신들의 소원을 기원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소원하는 바를 빌면 그 뜻을 이룰 수가 있는데, 만약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빌면 큰 뱀이 나무에서 떨어지고,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였다고 한다.
■ 2. 내서 초군(樵軍) 놀이
옛날 내서 남촌군(南村群) 마을과 북촌군(北村群) 마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광려천(대곡산과 정봉산으로부터 흘러내림) 맑은 물로 농사를 지으면서, 서로 화합하면서 살아갔다. 그래서 세벌 논매기를 마치는 시기에 풍농을 기원하는 성신선고(聖神宣告)를 같이 올렸는데, 이때 초군들이 들판이나 산에서 퇴비를 장만하기 위해 부르는 두레풀베기 등지소리와 놀이 등은 장관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또 농사일을 마친 겨울철과 이듬해 봄까지는 물구리나무와 깔비나무를 하기 위하여 큰 산등을 타면서 불렀던 나무꾼 소리와 놀이에는, 초군들의 노동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서가 잘 반영되어 있었다. 이러한 유래를 가진 놀이가 바로 내서 초군놀이이다. 이 놀이는 1995년에 발굴되어 경남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내서초군놀이는 초군들의 간절한 소망인 풍농을 기원하고, 예로부터 전해지는 토속적인 등지소리와 놀이, 나무꾼 소리와 놀이 등을 통하여 옛 조상들의 얼과 화합정신을 되살리는 한마당 놀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내서초군놀이는 먼저 내서지역의 형태에 따라 북촌과 남촌으로 나누어 대기(大旗)를 앞세우고 풍물패· 초군· 마을사람 등의 순으로 배꾸마당으로 모인다.
좌상(座上)이 "오늘 같은 날 우리 모인 김에 금년시절이나 조크로 성신선고(聖神宣告)를 올리고 저-시리봉 밑에 가면 평평한 평지가 있는데, 거게 가면 초지가 아주 무성하네. 거기에 가서 두레풀을 비어다가 공동거름을 장만하도록 하고, 저쪽 대곡산 큰 산에 가서 물구리나무, 물개똥나무, 물오리나무, 깔비나무, 아무기나 닥치는 대로 비어다가 밥도 해 묵고 소죽도 끼리거로 심대로 한 짐 하도록 하세" 하고 말하고 초군들이 대답하는 것으로 초군놀이가 시작된다. 이때 풍물이 울리고 고동수는 고동을 띄우며 모두 높은 산으로 떠난다.
[첫째마당: 두레풀 베기 놀이]
남촌과 북촌의 초군들은 풍물을 앞세우고 자기편의 영기(令旗)를 지게에 꽂고 두레풀자리를 향해서 나아간다. 이때 북을 발걸음에 맞추어 가볍게 치고 초군들은 다음과 같이 외친다. "다리야 걸어라 오검아 힘쓰자" 풀자리에 도착한 초군들은 지게를 세워 놓고 낫으로 풀베기를 시작하는데, 이때 고동수가 풀베기 시작을 알리는 처음 고동을 분다. 초군들은 고동소리를 시작으로 등지소리나 노래 가락 등을 부르면서 열심히 풀베기를 한다.
등지소리가 끝날 무렵 좌상은 풀자리 옆에서 “두레풀을 제일 작게 벤 초군은 벌주 한 말을 내기로 한다.”고 말하며 풀을 많이 베도록 독촉한다. 이때 고동수는 반 고동을 띄운다. 이것은 풀 반 짐을 알리는 신호이며, 고동이 울리면 담배도 피우고 잠깐 쉬는 시간을 마련한다.
조금 후 고동수가 온 고동을 띄운다. 이것은 풀 한 짐을 다 베었다는 신호이며, 이제 작업을 마치고 배꾸마당으로 내려가자는 신호이다.
초군들은 자기편의 영기를 지게에 꽂고 풀을 짊어지고 풍물과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고, 지게 목발로 장단을 맞추면서 산의 풀자리에서 배꾸마당으로 내려간다. 배꾸마당에 도착한 초군들은 자기 편(남·북촌)의 영기를 중심으로 영산 다다르기 장단이나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기굿을 한판 벌린다. 이때 좌상은 풀의 분량이 많고 적음을 가려내기 위해, 풀지게를 일일이 점검한다. 좌상은 풀을 가장 많이 벤 초군에게는 장원상을 내리고, 가장 적게 벤 초군에게는 벌주 한 말을 내리게 한다. 그래서 풀을 제일 적게 벤 초군은 목말을 타고 부인에게 가 부인이 막걸리 한 말을 초군들에게 대접하게 한다. 좌상이 풀지게를 검사할 때 초군들은 서로 풀을 많이 베었다고 우긴다. 벌주를 얻어먹고 장원상을 탄 초군은 목마에 태워서 주위를 한 바퀴 돌게 하는데, 이때 모두들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리고 좌상이 "두레풀을 모두 모우세"하고 말하면, 초군들은 풀을 모두 모아 놓는다.
그리고 초군 중 한 사람이 "자! 우리 벌주도 얻어먹었으니 낫치기로 풀 따 묵기 해보까?"하고 말하고, 다른 초군들이 동의하면서 낫치기 놀이가 시작 된다.
낫치기 놀이(낫 던지기)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선을 긋고 낫 던지기를 하는 놀이인데 모두 한 번씩만 실시한다. 이 놀이를 '풀 따먹기'나 '꼬내 먹기' 등으로도 불렀다. 낫치기 규정은 낫 끝이나 낫 손잡이 나무를 잡고 공중으로 던지는데, 이때 낫의 끝이 땅에 꼽히게 되는 것과, 낫의 끝이 오른쪽으로 보게 되면 ‘에우’라 하고, 낫의 끝이 왼쪽을 보게 되면 ‘오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등위는 일등은 낫 끝이 땅에 꼽히는 것이고, 이등은 ‘에우’, 삼등은 ‘오리’였다. 이 놀이에서 이긴 편의 초군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풀을 바지기에 모두 담고, 진편의 초군들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새로운 놀이를 제안한다.
"낫치기는 우리가 졌지만 다음에는 공치기를 하여 판가름 내어 보까?" 하고 진편의 초군 중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한다. 이 제안을 이긴 편의 초군들은 처음에는 응하지 않다가 못이기는 듯이 슬그머니 승낙을 함으로써 새로운 놀이가 시작된다.
새로운 놀이인 공치기 놀이는 남촌과 북촌의 대표가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이긴 사람이 공을 잡고 자기편이 공을 치기 유리하도록 자기 편 앞에 놓는다. 공을 놓는 즉시 초군들은 공치기를 하는데, 이때 구호는 "울리공, 울리공,.."이라고 같이 외친다. 공치기 놀이는 공이 목적 지점에 들어가는 편이 이긴다. 공치기에 이긴 편은 흥겨워하면서 풀을 모두 가져 갈 수 있고, 진편은 공연히 트집을 잡으며 실랑이를 벌린다.
이때 좌상이 나서며, "남촌 북촌 초군들아! 이러지 말고 우리 같이 두레풀을 비었으니 퇴비거름을 함께 만들어서 고루 나누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노?"하면서 두 진영의 화해를 주제한다. 초군들 대부분은 그러자고 대답하지만, 몇몇 초군은 계속 실랑이를 벌리는 등 소란을 피우다가 못 이기는 듯이 좌상의 설득에 굴복한다.
그리고 모든 초군들이 풀을 한군데 모으고 퇴비거름을 만드는 시늉을 한다. 풀을 모으고 밟고 똥오줌을 주는 시늉을 하는데, 이때 노래 가락도 부르고 탁주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잠깐 쉬기도 한다.
첫째 마당은 이렇게 소박한 놀이를 통하여 초군들의 고달픈 시름을 풀어내고, 궁극적으로는 남촌과 북촌이 서로 단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둘째 마당: 나무꾼 일노래]
바자리 없는 맨 지게에 까꾸리(갈퀴)를 꽂고, 질빵을 꽉 달아맨 초군들과 물구리나무를 할 초군들은 낫을 꽂고 지게 목발을 앞으로 눕혀 지고 간다. 그리고 지게 목발 장단을 치면서 나무꾼 일 노래를 부른다. 나무꾼 일 노래는 지정된 곡이 없고 그저 초군들의 고달프고 한스러운 소리로 나무 일의 고달픔을 풀어보는 노래였다.
노래가 끝나면 초군 한 사람이 "우리 남촌· 북촌 갈라서 깔비 따묵기 어장치기 하까?"하고 제안한다. 다른 초군 한 명이 "깔꾸리가 엎어지면 묵기고, 뒤비지면 진다이"하면서 놀이의 방법을 설명한다. 이 놀이는 한 번에 깔비 한 장씩을 타 놓고 따먹기를 하는 것인데, 초군들은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어 일렬로 서서 까꾸리 던지기를 한다. 까꾸리 던지기 결과에 따라 깔비나무를 몽땅 얻기도 하고 또 잃게 되기도 한다. 이 깔비나무꾼(초군) 놀이는 깔비나무로 장을 만들어 한 짐씩 지고 산에서 내려온 초군들이 똥뫼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잠깐 쉬는 동안에 하는 놀이였다.
이 둘째 마당에서 부르는 나무꾼 노래는 나무할 때의 고달픔을 달래주고, 생활의 애환을 풀어준다는 의의가 있다.
[셋째 마당: 배꾸마당 한판놀이]
좌상이 "남촌 북촌 초군들아, 우리 오늘같이 좋은 날에 묵은 시름, 묵은 근심 걱정, 묵은 감정, 묵은 액운 다 잊어버리고 동네 굿이나 벌려서 한마당 놀아보세" 하고 외치면 연이어 풍물이 울린다. 그리고 풍물꾼, 초군들, 동네 사람들 모두는 박 바가지를 띄운 술동이를 가운데 놓고 둘러선다.
상쇠의 선창에 따라 노래를 같이 부르던 사람들이 일제히 반절을 올린다. 풍물은 영산 다다래기 가락을 치고, 고시레를 한 다음 농주를 마시고 동네 사람들은 한데 어울린다.
이어 개인 장기자랑 놀이가 벌어지는데, 장기자랑 놀이에는 '북 놀이', '벅구춤 놀이', '농부춤 놀이', '지게 목발을 치면서 노래 가락 부르기', '들돌 들기 놀이', '엉덩춤 놀이', '고동 띄움', '병*신춤' 등이 있다. 이런 각종 개인 장기 자랑으로 흥겨운 한마당 판굿놀이를 벌리고, 윷놀이도 벌려서 흥을 한껏 고조 시킨다.
이어서 퇴장이 진행되는데, 퇴장할 때는 자연스럽게 모여 선 채로 사방으로 인사를 올리고, 기러기가 날아가듯이 두 팔을 벌리고 덩실덩실 흥겹게 춤추며 못내 아쉬운 듯이 서서히 퇴장한다.
이 셋째 마당은 동네사람들과 초군들이 서로 어울려 각자 가진 장기로 흥겹게 노는 한바탕 놀이로 서로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협동 단결하는 마음을 보여준다.
■ 3. 진동낙화축제
마산시 진동면에서는 사월 초파일 즈음하여 매년 '진동낙화(落花)축제'를 연다. 그 기원은 1천 8백년 전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1936년 진동 보애정각 낙성식 때 3일간 축제를 벌이면서 "봉래산을 휘감는 낙화가 장관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문헌으로 전해오는 것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예전에는 사동 봉래산을 휘감는 낙화를 국도 양편의 수양버들에 연달아 엮어서 진동까지 이어지게 하였는데, 불꽃으로 수놓아 불야성 같은 야경은 별천지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또 고현 선착장 앞바다에서는 수 십 척의 배가 드문드문 돛대를 이어 연결시켜서 낙화야경은 그야말로 절경을 이루었다.
이렇게 절경을 이루던 진동 낙화 축제가 점차 사라져 가는 것을 우리 고장의 민속 문화를 지키겠다며 나선 진동 청년회의 노력에 의해 다시 재현 발굴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진동낙화축제는 마산의 대표적인 민속 행사로 큰 성황을 이루고 있다.
진동면 낙화의 특징은 화약 대신 느티나무(귀목)의 껍질을 태워 만든 숯가루와 사기가루를 섞어 한지에 말아 30cm 가량의 한지 막대를 태우는 것이다. 숯가루가 흘러내리면서 타는 불꽃과 사기 가루가 타면서 내는 파열음이 그 특색이라 하겠다. 불꽃은 대략 한 시간에서 한시간 반 정도를 타면서 낙화를 만든다.
진동의 낙화축제는 현재 마산 고현의 명물인 미더덕을 함께 소개하는 축제인 ‘진동불꽃낙화와 미더덕 축제’로 그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 4. 만날제
마산 만날제는 마산시 현동과 월영동의 경계에 위치한 만날고개에서 해마다 열리는 마산의 대표적인 민속행사이다. 특히 만날제는 만날고개에 얽힌 모녀간의 애틋한 상봉전설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인 만남과 그리움을 주제로 한 민속테마 축제이다. 만날고개는 예전에 처녀들이 시집을 가면 친구들을 만나기 어려웠으므로, 추석날을 기해 여러 지방에 흩어져 있던 친구들이 각각 음식을 해 와서, 이 고개에서 만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서로 정담을 나누었다는 이야기, 또 출가한 딸과 친정 어머니가 이 고개에서 만나 한 많은 사연들을 주고받으며 혈육의 정을 나누었다는 전설 등 만날고개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그 세월만큼 많고 애틋하다.
1987년부터 열린 이 행사는 먼저 만날고개 제단에서 마산의 번영과 시민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시작으로 개막된다. 행사기간에는 만날제 향연과 그네뛰기·널뛰기·윷놀이·시민 노래 부르기대회, 미인대회, 효부, 효녀상 수여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려 시민들이 한데 어울려 즐길 수 있게 된다.
만날제는 점차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소개하는 의미 있는 민속 행사이다. 또한 1987년 개최 이래 20년 넘게 유지되어온 마산의 독특한 전통 예술혼이 살아 숨 쉬는 고품격 축제라 할 수 있다.
특히 2006년부터는 만날제를 추석 전 대표 민속축제로 육성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한가위 달 축제"라는 주제로 단위 축제로는 드물게 전야제를 도입하여 창작 국악뮤지컬을 주제 공연으로 한 다양한 장르의 격조 높은 공연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합포만의 수려한 자연 경관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만날 공원은 마산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 5. 농청(農廳) 놀이
음력 7월 15일은 백중일인데, 이 날이 되면 마산시 봉암동에 있는 반룡산 어복곡에는 인근 각지에서 수 만명의 주민들이 모여들어 장관을 이루었다. 어복곡에는 상투바위· 상사암· 무지개 웅덤샘· 약수정 등 신령한 약수터로 이름난 곳이 많았다.
처음에 반룡산 어복곡에서 가족 단위로 산신제, 용왕제를 지내오다가 영험이 있다는 소문이 나자 차츰 이 모임의 양상이 달라져 민속놀이로 발전하게 된 것이 바로 ‘농청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농청놀이의 연원을 ‘두레’에서 찾기도 하는데, 두레는 원시 공동체에서 전래된 촌락 단위의 자치 조직으로서 마을의 경제, 군사, 노동 단체이며 공동체적 생산과 협동의 단체로서 그 의의를 가지고 있다.
마산의 농청놀이는 줄곧 전승되어 오다가, 일제 때인 1929년부터 중단되었다. 그러던 것을 1981년 마산의 구상훈이 주축이 되어 마산민속문화보존회를 결성해서 이 농청놀이를 복원하였다. 이어 1983년 경남지방무형문화재 6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1988년에는 제 2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민속놀이 분야의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마산농청놀이의 놀이 개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농청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놀이의 모든 참여자가 자기편끼리 한곳에 모여 상투바위(놀이를 할 때 기를 꽂는 곳)에서 기제를 올린다. 농청 앞에 풍물패와 기잡이가 대기를 메고 나와 자리를 잡는다. 농청대기에는 ‘구강농청’, ‘봉청농청’이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고, “영차 영차” 소리를 지르며 깃대를 세우고 풍물을 울리면서 농청놀이가 시작된다.
깃대 앞에 멍석을 깔고, 명태, 밀떡, 꼼배기(밀, 보리 볶은 것)를 제수로 놓고, 좌상이 농주를 올리고 배례를 한다. 이때 풍물패의 신호에 따라 소기잡이는 깃발을 숙이고 농청원(農廳員)들은 엎드려 재배를 한다. 배례가 끝나면 풍물에 맞춰 ‘덕석몰이’를 하며 대기 밑으로 몰려든다. 덕석몰이는 처음에는 새가 모이를 쪼듯 기세를 올려 함성을 지르며 모여들었다가 서서히 대열을 풀며 상투바위로 향하게 된다.
[첫째마당: 기싸움]
구강농청패와 봉청농청패는 각각 죽고동을 선두로 풍물패가 뒤따르고 다음에 장정들이 호위하는 농청대기가 서고, 들메에 좌상이 올라 앉아 총지위를 한다. 그 뒤에 남자들은 기구와 음식을 실은 지게를 지고 아낙들은 질그릇을 이고 풍물을 울리며 일대 행렬을 이룬다.
행진을 하다가 딴 농청의 행진과 만나면 각기 죽고동을 울린다. 좌상이 장죽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러 호령을 한다. 농청원들은 대기에 몰려와서 한 패는 자기의 농청기를 둘러싸서 농청기를 지키고, 한 패는 상대편의 대기를 꺾는 기세로 진을 친다.
양편 모두 앞뒤로 원을 이루며 빙빙 돌다가 죽고동이 울리면 일제히 함성을 지른다. 그리고 공격대는 상대편 대기를 향해 돌풍같이 몰려가서 대기를 지키는 패와 격동하여 난장판을 이룬다. 공격대가 깃대를 타고 올라가다가 바지가 잡히면 하반신이 드러나게 되니 바지가 벗겨지지 않게 움켜지다가 떨어지기도 하고, 저고리가 잡혀 상체가 벗겨지기도 한다. 이런 모습으로 달려들고 막고 하는 일대 난투극이 벌어진다. 소기패와 아낙들도 자기편을 응원하기 위해 깃발을 흔들면서 고함을 지르며 대기 주위를 돈다.
이렇게 싸우다가 한 쪽의 깃대가 기울기 시작하여 넘어지고, 결국 깃발이 풀어지게 되면 그 편이 패배하게 된다. 이긴 편은 환호성을 울리고 밀대 방석을 흔들며 상투 바위 앞으로 달려가 대기를 바위에 꽂는다. 진편은 땅을 치고 통탄하다가 이긴 편 풍물패의 권유에 따라 넘어진 대기를 수습하여 바위 하단에 꽂는다. 이때 대기 밑에 12개의 소기를 꽂는 것은 대기를 중심으로 화합함을 뜻하는 것이다.
[둘째 마당 :축원]
농청원들이 메고 온 밀대 방석을 상투 바위에 깔고, 아낙들이 이고 온 음식(술, 밀떡, 꼼배기 등)을 차려 놓고 일제히 엎드려 소원 성취를 비는 기도문을 왼다. 이 기도문을 성신선고라 한다.
이 때 상투 바위에 축원하는 모습은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데, 어떤 이는 종이에 불을 붙여 손으로 떠받들어 날려 보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병든 노모를 업고 나와 기도를 올리기도 하며, 몸이 불편한 이들도 와서 정성껏 합장 배례를 한다.
[셋째마당: 흥치와 회향]
농청원들은 술과 음식을 실컷 먹고 마시고 나면 양 농청 간에 여러 가지 경기와 놀이를 한다. 놀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즉흥적으로 할 수 있는 종목들이다. 태껸이나 서로 팔을 붙잡고 당기는 식으로 힘을 겨루기도 한다. 쌍방의 풍물이 나와 장기자랑도 하며 농부춤을 비롯하여 갖가지 춤으로 즐기기도 한다.
제일 인기가 있는 놀이는 씨름이었는데, 씨름으로 상머슴을 뽑는 일을 하였다. 쌍방에서 선발된 두 명의 장사가 나와 판을 벌여 이긴 장사가 상머슴이 되는데, 나락섬을 상품으로 주는 한 편 작두말을 태우고 좌상과 농군들이 소리를 지르며 덩실덩실 덧배기 춤을 추며 즐겼다. 백중이 머슴날이라는 것을 이런 놀이에서도 맛볼 수 있다.
각 농청 별로 무리를 지어 회동하며 춤을 추다가 쌍방이 한데 어울려 판굿을 하며 ‘쾌지나 칭칭 나네’를 부르며 상투 바위 앞에 모여 한바탕 놀다가 고별인사를 한다.
마산농청놀이는 오랜 전통을 가진 농청의 모습을 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특히 기싸움의 유풍은 우리나라 서민들의 기상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상투 바위에 대한 속신도 민간 신앙의 한 형태로 그 독특한 양상을 엿볼 수 있다. 또 마지막 판굿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놀이와 가락과 춤은 순수한 농민의 생활상을 투명하게 표출하고 있으며, 쌍방의 힘과 권위를 위해서는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도 승패가 가려진 다음에는 회동하여 즐기는 농민의 인정미를 느낄 수 있다.
■ 6. 문창제 놀이
지방무형 문화재 제 5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창제 놀이는 1606년 창원시 동정동에서 태어난 황시헌 선생의 충절심을 근간으로 하여 이루어진 놀이이다.
인조 14년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 20만이 침입하여 당시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남한산성 주위에 진을 쳐 인조대왕의 항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황시헌 선생은 창원 부사 백선남과 함께 다수의 의병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가던 도중 지금의 경기도 관주군 쌍령에서 적의 기습을 받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하였다.
그 후 창원대도호부의 역대 부사들이 백성들과 함께 공의 비각과 제형을 올리고 그 충의의 얼을 추모하는 각종 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이 행사가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것을 마산시 산호동에 거주하는 정경수가 창원노인회의 협조를 얻어 당시 놀이 형태을 더듬어 4과장으로 복원하여 재현하였다.
이 창원의 문창제를 마산의 놀이로 기재할 수 있는 것은 이 행사가 치뤄지던 당시는 마산, 창원의 지역 개념이 없이 모두 한 울타리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행사의 재현을 마산 산호동의 정경수가 했다는 점도 이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문창제의 각 과정별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1 과장: 제향(祭享)]
우집사 ‧ 좌집사가 양쪽으로 서서 먼저 절을 하고 나면 징과 북이 울리고, 초헌관이 들어서서 분향하고 잔을 올리고 배례한다. 그 뒤에 아헌관 ‧ 종헌관도 앞과 동일하게 제향을 올린다. 이것은 종교적 이념의 바탕에서 오는 우리 민족의 숭조사상(崇祖思想)으로 지극한 효성심과 충성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제 2과장: 추도무(追悼舞)]
10여명의 고녀(鼓女)들이 소복 차림으로 한삼을 끼고 황시헌의 비각 앞에 나란히 엎드려 배례하고 일어서면서 한삼을 뿌린다. 그리고 음율과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장단이 끝나면 춤도 끝난다. 그리고 창(唱)에 따라 원을 그리면서 합창하다가 창이 끝나면 춤도 끝난다. 이 추도무는 원한 맺힌 황시헌 공의 넋을 위로하고 명복을 빌며 추도하기 위한 것이다.
[제 3과장: 군노(軍奴)놀이]
창원 부사 황공 ‧ 관병 ‧ 의병과 청장(淸將) ‧ 청병(淸兵)들이 함께 쫓아 나와 다 같이 어울려 패랭이 춤을 추다가 엇갈려 관병을 한 곳에 몰아넣고 빙빙 돈다. 이어 부사 ‧ 황공이 죽고 관병 ‧ 의병이 모두 죽으면 또 한 무리의 의병이 나와 돌멩이와 몽둥이로 청병을 쫓아내고 땅을 치며 울다가 부사와 황공을 업고 나간다.
이 군노(軍奴)놀이는 부사의 시체를 감싸며 최후를 마치는 공의 장렬한 죽음과 우리 민족의 강직성과 정의감을 형상화한 것이다.
[제 4과장: 매귀굿]
꽹과리‧ 징 ‧ 북‧ 장구를 울리고 백성들은 음율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공의 비각 앞에 이르면 저마다 명복을 비는 절을 한다. 또 일어서서 빙빙 돌며 춤을 추다가 상쇠가 성진선고(星辰先考)를 하면 일제히 손을 들어 환호를 올린다.
이 매구굿은 비각 앞에서 백성들이 저마다 집안의 태평과 자손의 창성, 그리고 풍농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종교의식이 강한 우리 민족의 순박성과 후대의 영원한 번영과 발전에 대한 기원을 엿볼 수 있다.
■ 7. 성신대제
성신제는 “성신이란 명칭이 문자 그대로 뱃사람들이 귀항할 때 풍랑이 불면, 별이 희미하게 흐려져 항해가 어려운 데 이것은 등대가 없던 상고시대부터 고기잡이 뱃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는데, ‘별’에 기원하는 풍습이 풍부, 안택, 고기 장사가 잘 되기 등에까지 기복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전한다. 그러므로 성신이 마산 어민의 바다 항로를 밝혀주는 별에서 후대에는 어민에게 풍어를 안겨주는 성격으로 바뀌었으며, 마산 어민 전체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낸 것이 성신제라고 할 수 있다.
성신제는 일제시대까지 해마다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성신을 모셔 놓은 사당이 도로가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성신제도 상당과 하당제의 형태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상당에서 지내는 제의는 다른 지역의 제의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엄숙히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때의 상당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산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주에 의해 경건한 분위기에서 유교적 제의가 이루어진 후 대동 축제의 성격을 띠며 모든 마산 어민이 참여할 수 있는 하당제, 즉 거리제가 치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당제는 무당을 불러 행해졌으며, 마산 어민이 모두 동참하는 대동축제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결국, 성신대제는 그 옛날 마산지역의 당제로 여겨진다. 성신은 바다를 연하여 삶을 꾸려 나갔던 우리 마산 사람의 삶과 직결되는 마산 지역민의 수호신이라 할 수 있다. 이 별신을 모시고 제를 지냄으로써 우리 선조들은 그들의 삶의 평안과 풍요를 빌었고 그것은 마산 주민의 대동 축제였다.
무당의 주도로 마산 시민 전체가 참여할 수 있는 거리제에 관련된 자료는 1987년 성신제를 복원하면서 함께 복원된 마산 문화원의 자료가 전해진다. 그 자료에 따르면 놀이 마당은 크게 세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마당: 축원]
장정(어부) 10여명이 ‘어기영차’ 소리를 지르며 신목을 메고 들어와서 나무 끝에 방울 5개를 달고 축대 위에 세운다. 이어서 성신대제기를 앞세우고 마을 대표 1명과 제관 6명, 무당 3명, 걸립패 2-3명과 어구를 맨 어부 10여명이 신목을 가지고 온 장정과 어울린다.
미리 차려놓은 제단 앞에 마을 대표가 유건(儒巾), 도포(道袍) 차림으로 서고 마을의 두 집사가 향을 사르고 촛불을 켜서 헌작(獻酌), 재배(再拜), 고천독축(告天讀祝)한다.
축문을 읽고 다시 재배할 때 일제히 절한다. 이 때 걸립패는 제단 주위를 둘러 서 있고 고천독축을 읽고 나서 제관의 오른 쪽에 다 같이 서 있다가 무당이 재배하면 다 같이 절한다. 그리고 무당은 굿을 시작하는데, 이때 걸립패는 방해가 안 되게 낮은 소리로 풍물을 치며 화합한다. 소지를 올리면 굿이 끝난다. 이어 무당이 퇴장하고 서로 강복을 축하하며 걸립패가 한판 놀아댄다. 상쇠의 신호로 가무음곡이 그치면 모든 사람이 퇴장한다.
[둘째마당: 풍어놀이(꼬시락잡이)]
축원마당을 마친 뒤 정렬하고 잠깐 풍물이 울린다. 상쇠가 요리조리 살피면서 풍물소리를 딱 그치게 하고 “꼬시락 떼다”라고 외친다. 그러면 모두 같이 “꼬시락 떼다”를 합창하면서 풍물을 요란하게 울린다.
이때 어구를 맨 어부가 무대를 세 바퀴 돌면서 “저기다” 하면서 무대 한 모퉁이에 늘어서서 줄 끝을 잡고 이리저리 꼬시락 떼를 얕은 물 속으로 모는 동작을 한다. 걸립패는 낮은 소리로 풍물을 울리고 마을 사람들은 무대 앞에서 흥겹게 춤을 춘다. 몰아붙인 꼬시락 떼를 크게 함성을 지르면서 원형으로 포위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릇으로 꼬시락을 건져 올린다. ‘어기영차 어기영차’ 하면서 어부와 마을 사람들이 흥겹게 노동요를 부른다. 이때 멀리 나갔던 배가 풍어기를 펄럭이며 들어온다. 모두가 손짓하며 “저기 배가 들어온다”고 외친다. 이때 걸립패는 가장 요란하게 풍물을 울리며 절정을 이룬다.
고기잡이배도 만선을 이루어 무사히 마을로 돌아왔고 마을 사람들은 꼬시락을 많이 잡은 기쁨으로 어쩔 줄 모른다. 어부는 어구를 어깨에 메고 마을 사람들은 잡은 꼬시락 함지를 머리에 이고 걸립패를 앞세우고 “꼬시락 사이소!”를 외치면서 세 바퀴 돌고 퇴장한다.
[셋째 마당: 선창 걸립패]
축원도 드렸고 고기도 많이 잡았으니 이제는 복을 마을 구석구석에 나누어 달라는 뜻과 소원을 안고 걸립패와 더불어 신나게 논다.
걸립패는 어부를 따라 무대를 세 바퀴 돌고 동쪽을 향해 관람객에게 인사를 한다. “선창 걸립패요, 복 많이 받으소서” 절을 한 다음 성주풀이 조왕말기로 한 판 논다. 서쪽을 향하고 남쪽을 향하고 북쪽을 향하면서 똑 같은 장면을 재연한다. 이러한 연속 장면을 재연하면서 마을로 도는데 처음 봉암에서 시작하여 산호동, 그리고 창동으로 갔다가 월영동을 참배하고 까치날을 둘러서 가포까지 가서 우렁찬 함성을 내지른다. 다시 성주풀이를 하다가 한바탕 신명을 풀며 상쇠의 지휘에 따라 풍물을 치면서 그야말로 질서정연하게 행사를 마친다.
마산문화원에서 추진하여 여러 가지 성과물을 기록한 성신대제 연구팀의 『마산 성신대제 연구』에 의하면, 마산의 성신제는 3월 중에 별신제의 형태로 치러졌으며, 성신제가 끝난 뒤에는 오광대 놀이가 있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때 오광대 놀이는 마산 어민이 함께 즐기고 어울려 마을의 화함과 안녕을 기원하는 대동 축제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마산지방의 오광대는 성신제 뒤에만 열렸다고 하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신제가 가지는 특별함, 즉 성신제가 얼마나 중요한 제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성신대제는 가장 오랫동안 이어온 해양도시 마산의 습속이며, 지역민이 총동원되어 행했던 축제의 마당이었다. 이러한 행사가 시대 조류와 산업화로 인해 그 행사가 중단되는 위기에 처해졌었다. 그러나 그 맥을 이어가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1903년부터 1928년까지의 개최, 1954년의 행사, 그리고 1980년대 들어 성신대제 복원을 위한 사업과 축제의 개최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본격적인 원형 발굴과 유지를 위해 2006년 10월 마산성신대제복원추진위원회를 개최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학술연구발표회와 성신대제 연구의 서적 발간, 원형을 형상화한 기획 공연 등의 행사는 매우 알찬 결실이라 할 수 있다.
■ 8. 마산 오광대(五廣大)
오광대는 경남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가면극으로, 처음에는 합천(陜川) 초계(草溪) 밤마리(栗旨里)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밤마리는 지리적으로 경남의 중심지인 동시에 낙동강 중류에 위치한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상인들의 후원으로 오광대놀이가 활발하게 연행되었다. 따라서 밤마리 장터에서 관람한 다른 지방 사람들이 자기 지방에 가서 오광대놀이를 재연하면서 이것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대본이 채록된 것은 진주· 마산· 가산 등이다. 오광대란 명칭은 다섯 광대가 나와 오방(五方)의 잡귀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연희의 시기는 처음에는 음력 정월 대보름 밤을 중심으로 연행되었으나, 나중에는 3월 보름, 4월 초 봄놀이, 9월의 단풍놀이에도 오락적 연희로 연행되었다.
마산 오광대의 자료는 최상수가 1963년 『경상남도지(慶尙南道誌)』하권에 채록한「야유·오광대 가면극(野遊·五廣大 假面劇)」에 실린 자료가 유일한데, 이 자료에 의하면 마산 오광대는 제 일장 - 오방신장무(五方神將舞) 과장(科場), 제 이장 - 상좌(上佐) 노장(老長) 중 과장, 제 삼장 - 문둥이 과장, 제 사장 - 양반(兩班) 과장, 제 오장 - 영노 과장, 제 육장 - 할미·영감 과장, 제 칠장- 사자무(獅子舞) 과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광대는 대체로 앞과 뒤에 춤이 위주인 제의적(祭儀的) 놀이 단위들이 위치하고, 그 가운데 부분에 대사와 동작이 위주인 연극적 놀이 단위들이 위치하는 것으로 구조화 되어 있다. 이런 구조에서 마산 오광대 놀이를 과장별 춤으로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오방신장춤 - 오방 신장춤 놀이는 들놀음에는 없고 오광대에만 있다. 오방신장춤은 첫 과장으로 오광대란 말이 여기에서 연유되었다고 할 정도로 주요한 의미를 가진 과장이다. 이 과장에서는 오방신장(五方神將)들, 즉 중앙(中央) 황제장군(養帝將軍)· 동방(東方) 청제장군(靑帝將軍)· 서방(西方) 백제장군(白帝將軍)· 북방(北方) 흑제장군(黑帝將軍)· 남방(南方) 적제장군(赤帝將軍)들이 각각 등장하여 각 방위(方位)에서 말없이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이 과장은 극적 전개가 없는 의식무 과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놀이는 굿의 첫 머리에 부정 거리를 없애는 것처럼 오방신장무(五方神將舞)를 추어서 놀이 공간을 깨끗이 하고 놀이를 무사히 마치기를 기원하는 의도의 춤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 중춤 -
이 놀이도 들놀음에는 없고 오광대에만 있는 과장이다. 최상수가 채록한 마산 오광대 자료에 의하면 이 과장에서 중과 상좌가 춤을 추면서 부르는 중타령이 있는데, 마산오광대의 중춤은 다른 오광대에서 보이는 파계승에 대한 풍자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이 과장도 의식무에 가까운 형태라고 할 것이다. 특히 마산 오광대에서 행해지는 중타령은 무가(巫歌)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 문둥이춤 -
이 춤은 문둥이의 골수에 맺힌 한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며, 다른 지방 가면극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경남지방 특유의 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공연될 때는 관객에게 웃음을 던져주는 과장으로 그려진다. 즉, 일그러진 괴기(怪奇)한 가면을 쓰고 이리 저리 춤을 추는 문둥이 춤은 구경꾼들에게 큰 웃음을 주는 역할을 한다.
- 말뚝이·양반 춤 -
이 과장은 모든 오광대와 들놀음에서 놀이되는 과장으로 대개 양반 과장으로 부른다. 이 과장은 오광대와 들놀음의 중심적인 과장이므로 대사도 많고 공연시간도 길다. 이 과장에 등장하는 양반들은 가면극에 따라 3인 내지 7인이 등장하지만 원양반 혹은 수양반이라는 양반이 극의 전개를 주도하고, 이 외의 양반들은 부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 영노·양반 춤 -
영노의 상대역이 황제장군일 경우에는 영노·오방신장무라 부르고, 영노의 상대역이 양반일 경우에는 영노·양반 놀이라 한다. 영노는 경남지방 가면극 이외에 용례가 보이지 않아 정확히 말할 수 없으나 대사를 통하여, "무엇이든지 잡아먹는 하늘에 사는 무서운 상상의 동물"로 여겨진다. 이 영노가 호드기를 입에 대고 '비비' 소리를 내면서 양반을 위협하므로 '비비' 혹은 '비비새'라 부르기도 한다. 특히 양반을 잡아먹는다는 점에서 볼 때 악을 징벌하는 신수(神獸)라 할 수 있다.
경남지방 가면극의 영노·양반 놀이과장은 그 구성과 내용이 서로 비슷한 면이 많다. 이 과장에서 거드름을 피우던 양반이 영노를 만나 혼이 나고 마침내는 잡아먹히고 만다. 이 과장은 이러한 놀이를 통하여 양반의 허상을 풍자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 놀이는 앞 과장인 말뚝이 양반 과장과 깊은 연관을 갖게 된다. 즉, 말뚝이에게 망신을 당하고 용서를 구한 양반이 결국은 영노에게 살해당함으로써 탈놀이는 양반 풍자의 절정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 할미·영감 춤 -
이 놀이는 경남지방의 모든 가면극에 들어있는 과장이다. 이 과장은 할미의 익살스런 춤과 행위, 첩의 고운 맵시의 춤, 영감의 거드름 등에 극의 관심이 집중된다. 이 과장은 춤과 행위 위주의 과장이므로 각 가면극마다 대사의 변화가 심하다. 특히 이 과장은 영감의 부도덕한 생활에 대한 비판을 희극적으로 표현한 과장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경남지방의 오광대에서는 영감이 첩과 놀아나 첩이 아이를 낳게 되자, 할미와 첩이 서로 아이를 어르려다가 첩이 할미를 밀어 할미가 죽게 된다. 그러자 영감이 이를 애통해 하고 장례를 치루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 사자춤 -
이 과장은 오광대의 마지막 과장이다. 마산오광대 사자춤은 대체로 사자가 춤을 추다가 담비(혹은 범)를 잡아먹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벽사진경(壁邪進慶)의 가장 원초적인 의식무라 할 수 있다 특히 사자와 대립관계에 있는 담비를 등장시켜 보다 극적으로 발전된 형태라 할 수 있다. 민간에서는 호랑이도 무서운 맹수지만 "호랑이를 잡아먹는 담비"란 말도 있듯이 담비는 더 무서운 짐승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짐승들을 사자가 잡아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사자의 위력을 높여주는 것으로, 이 과장에 등장하는 사자는 잡귀나 잡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진 짐승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즉, 서민을 핍박하던 양반이 말뚝이에게 조롱을 당하고 마침내 영노의 밥이 되듯이, 범 역시 영노와 같은 기능을 가진 사자에게 살해된다는 것이다. 대체로 사자춤은 대사가 없이 춤만으로 이루어진다.
■ 8. 진동 큰줄다리기
진동 큰줄다리기는 대략 1800년을 이어 내려 왔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 놀이는 뱃사람들이 닷줄을 이용한 놀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그 규모가 너무 커 한해씩 걸러서 하기도 했다. 정월대보름날 달맞이 행사와 같이 부락의 안녕과 태평을 빌고 풍년과 풍어를 소원하는 뜻에서 행하여졌다.
그러나 이 놀이가 1965년 이후 진행되지 않던 것을 1992년 농업 경영인들이 한마음으로 모여 풍년을 빌기 위한 행사로 재발굴 하여 정월대보름 달맞이행사와 같이 제1회 진동큰줄다리기 행사를 개최하여 지금까지 성황리에 유지되고 있다.
초창기에는 줄에 대한 제를 올리고 큰줄다리기만을 하던 것이, 해가 변하는 동안 사람들의 참여도가 높아짐에 따라 부대행사를 기획하여 1부 행사로 당산제 및 8의사 창의탑 참배, 각설이 및 민요만담대회 등을 실시했고, 2부 행사로 비녀쇠 시가행진과 큰줄다리기 제례를 하고 본격적인 큰줄다리기를 하였다. 이후 각설이 공연과 달집태우기 및 풍물놀이로 행사를 마감했다.
옛날에 줄을 제작할 때에는 이 줄다리기의 줄이 닷줄을 확대하여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뱃사람들이 주로 줄을 만드는 감독을 했다. 짚은 여러 곳에서 수거해 수 백 동씩 쌓아놓고 물을 퍼 적시면서 주민들이 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여러 날 동안 줄을 만들고 줄을 지켰다.
줄다리기는 편을 나누어서 하는데, 진동의 동서를 구분하여 서촌으로부터 진북면, 진전면, 진동면, 사동, 죽전, 고현 등지가 서부쪽(숫줄) 편이고 광암, 다구, 도만, 구산면 마전 등지가 동부(암줄)편이 되었다. 줄은 3회에 걸쳐 당기게 되는데 인원수는 무제한이고 어느 쪽이거나 무슨 수를 써서든지 오직 사람이 많이 붙을 수 있으면 되는 것으로써 과거에는 큰 줄에 3~4천명이 당긴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줄을 당겨 그 쪽으로 줄이 당겨진 편이 이긴 것으로 승부를 판가름했는데 숫줄이 지면 이것을 암줄이 살고 숫줄이 죽었다고 표현하여 다음 날 서부 편에서 상여를 만들고 여자를 상주로 해서 작대기를 집고 울고 곡했다. 또 풍악을 울려 줄에 가서 서방이 죽어 과부가 되었음을 고하며 술을 부어 제를 지냈다. 그리고 진동 시내를 누비며 풍악을 울리면서 풍년과 안녕을 빌었다고 전한다. 현재는 이런 풍속 없이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다리기 했던 줄을 가져가서 태우면 복을 받는다고 하여 줄다리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줄을 풀어가고, 마지막으로 달집태우기를 하면서 소원을 비는 것으로 행사를 마무리한다.
■ 9. 민속 경연대회
① 그네뛰기
그네를 마산에서는 구네, 군대, 군듸, 굴리, 그내, 근대, 근데, 술래, 군디 등으로 부르고 있다. 마산 지방의 그네뛰기는 진북면 지산천 숲의 그네뛰기가 유명한데, 900여년 전 진북면 지산천변의 숲에서 시작된 추천놀이는 1953년에 제 1회 경남 추천대회까지 개최할 정도의 행사로 발전했다.
그네뛰기는 씨름과 더불어 단오놀이의 주요 종목으로 굳어져서 전국적으로 즐기는 놀이이다. 그러나 단오절의 세시적 풍습이 쇠퇴하면서 추석 때나 각종 축제 때에 그네뛰기 대회를 여는 곳이 많아지게 되었다. 마산의 가고파 축제나 만날제 축제 행사에 가장 인기를 끄는 종목 중에 하나도 바로 그네뛰기이다.
그네뛰기 경기의 승부는 그네의 발끝이 높이 올라간 사람이 이기는 것인데 그네의 끝이 앞으로 올라가는 자리에 높이를 측정하는 장대를 세우거나 그 뒤에 방울을 달아 놓고 이것을 발로 차서 소리를 내게 하는 방법이 있다. 또 그네 발판에 가느다란 줄을 매달아 이 줄로써 그네가 오른 길이를 측정하는 방법도 있다.
그네는 그 뛰는 방법도 다양하지만 그네 뛰는 모습이 특히 아름다워 시문이나 그림에 자주 묘사되기도 한다. 그네는 혼자 뛰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뛰는 쌍그네도 있다. 또 그네를 뛸 때 여자들은 대부분 다채로운 한복 차림으로 하는데 그 모습 자체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여자들에게 더없는 운동이 되기도 한다.
② 씨름
씨름은 우리나라 전 지역의 놀이이기 때문에 우리 마산만의 민속놀이로 생각할 수는 없으나 마산 지방을 비롯한 경남 지방에 특히 성행하는 놀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점은 또한 마산에서 역대로 이만기를 비롯한 씨름 장사가 많이 나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씨름은 본래 단오절의 놀이로서 유래되고 있으나 마산 지방을 중심으로 한 경남 일원에서는 단오보다 추석에 씨름을 하는 곳이 많다. 주로 소년이나 청년 남자들이 하는 놀이지만, 여자도 그들끼리 씨름대회를 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씨름은 옛날 풍속과는 달리 경기 운영 방식을 공식화하여 경기를 하고 있다. 즉 1955년 이후에는 선수의 체중에 따라 체급을 한정하고, 시합장의 크기도 규정으로 정하고 있다.
우리 마산의 씨름은 김해 지방의 씨름이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김해는 낙동강 하류의 모래 사장이 좋아 씨름이 성했고 따라서 씨름 기술, 경기 방법이 많이 발달해 왔기 때문이다. 복장은 옛날 씨름에서는 띠를 주로 사용해 왔지만 지금은 샅바를 사용하고 있다. 샅바의 굵기, 천의 종류는 씨름 협회의 규정으로 정하고 있다.
■ 1. 동제(洞祭)
동제는 동우제(洞虞祭)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민간 신앙으로 대체로 정월 대보름에 지냈다. 동제는 한 마을을 중심으로 주민 전체가 제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하여 제물을 마련하고, 제관을 뽑고, 공동의 금기를 지키며, 마을 공동의 평안과 행복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제관은 40대 이상의 남자로, 집안에 부정(不淨)-산고(産故), 태기(胎氣), 해산(解産)-이 없는 사람으로 뽑았다. 뽑힌 제관은 제를 올리기 전 일정 기간 대문에다 금줄을 치고 치성을 드렸다.
그리고 마을의 당목(堂木)에도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려 그 곳에는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제사 당일날은 제단에 제물을 올리고 분향(焚香)· 참신(參神)· 헌작(纖酌)· 독축(讀祝)· 재배(再拜) 등의 순서를 거쳐 마을의 호수대로 소지(燒紙) 축원을 했다. 이러한 절차가 끝나게 되면 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음복(飮福)을 하고, 농악놀이를 하며 흥겨운 잔치마당을 펼쳤다. 이때 동제에서 모시는 대상 신들은 마을마다 조금씩 차이가 났다.
그 중 당산제는 마을 주변의 산에 신당(神堂)을 짓거나, 크고 오래된 나무 아래에 바위를 신단(神壇)으로 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마산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신당은, 마산시 추산동 산 1번지에 있는 산제당(山祭堂)을 들 수 있다. 사당은 2평 정도 되고, 그 안에 좌불상 1폭과 산신도 1폭이 있어서 치성을 드리도록 되어 있다.
이 제당은 3백년 내지 4백년 전에 지었다고 전해지며, 이곳에는 주로 부녀자들이 들려 자신들의 소원을 기원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소원하는 바를 빌면 그 뜻을 이룰 수가 있는데, 만약 도리에 어긋나는 것을 빌면 큰 뱀이 나무에서 떨어지고,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였다고 한다.
■ 2. 내서 초군(樵軍) 놀이
옛날 내서 남촌군(南村群) 마을과 북촌군(北村群) 마을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광려천(대곡산과 정봉산으로부터 흘러내림) 맑은 물로 농사를 지으면서, 서로 화합하면서 살아갔다. 그래서 세벌 논매기를 마치는 시기에 풍농을 기원하는 성신선고(聖神宣告)를 같이 올렸는데, 이때 초군들이 들판이나 산에서 퇴비를 장만하기 위해 부르는 두레풀베기 등지소리와 놀이 등은 장관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또 농사일을 마친 겨울철과 이듬해 봄까지는 물구리나무와 깔비나무를 하기 위하여 큰 산등을 타면서 불렀던 나무꾼 소리와 놀이에는, 초군들의 노동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서가 잘 반영되어 있었다. 이러한 유래를 가진 놀이가 바로 내서 초군놀이이다. 이 놀이는 1995년에 발굴되어 경남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내서초군놀이는 초군들의 간절한 소망인 풍농을 기원하고, 예로부터 전해지는 토속적인 등지소리와 놀이, 나무꾼 소리와 놀이 등을 통하여 옛 조상들의 얼과 화합정신을 되살리는 한마당 놀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내서초군놀이는 먼저 내서지역의 형태에 따라 북촌과 남촌으로 나누어 대기(大旗)를 앞세우고 풍물패· 초군· 마을사람 등의 순으로 배꾸마당으로 모인다.
좌상(座上)이 "오늘 같은 날 우리 모인 김에 금년시절이나 조크로 성신선고(聖神宣告)를 올리고 저-시리봉 밑에 가면 평평한 평지가 있는데, 거게 가면 초지가 아주 무성하네. 거기에 가서 두레풀을 비어다가 공동거름을 장만하도록 하고, 저쪽 대곡산 큰 산에 가서 물구리나무, 물개똥나무, 물오리나무, 깔비나무, 아무기나 닥치는 대로 비어다가 밥도 해 묵고 소죽도 끼리거로 심대로 한 짐 하도록 하세" 하고 말하고 초군들이 대답하는 것으로 초군놀이가 시작된다. 이때 풍물이 울리고 고동수는 고동을 띄우며 모두 높은 산으로 떠난다.
[첫째마당: 두레풀 베기 놀이]
남촌과 북촌의 초군들은 풍물을 앞세우고 자기편의 영기(令旗)를 지게에 꽂고 두레풀자리를 향해서 나아간다. 이때 북을 발걸음에 맞추어 가볍게 치고 초군들은 다음과 같이 외친다. "다리야 걸어라 오검아 힘쓰자" 풀자리에 도착한 초군들은 지게를 세워 놓고 낫으로 풀베기를 시작하는데, 이때 고동수가 풀베기 시작을 알리는 처음 고동을 분다. 초군들은 고동소리를 시작으로 등지소리나 노래 가락 등을 부르면서 열심히 풀베기를 한다.
등지소리가 끝날 무렵 좌상은 풀자리 옆에서 “두레풀을 제일 작게 벤 초군은 벌주 한 말을 내기로 한다.”고 말하며 풀을 많이 베도록 독촉한다. 이때 고동수는 반 고동을 띄운다. 이것은 풀 반 짐을 알리는 신호이며, 고동이 울리면 담배도 피우고 잠깐 쉬는 시간을 마련한다.
조금 후 고동수가 온 고동을 띄운다. 이것은 풀 한 짐을 다 베었다는 신호이며, 이제 작업을 마치고 배꾸마당으로 내려가자는 신호이다.
초군들은 자기편의 영기를 지게에 꽂고 풀을 짊어지고 풍물과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고, 지게 목발로 장단을 맞추면서 산의 풀자리에서 배꾸마당으로 내려간다. 배꾸마당에 도착한 초군들은 자기 편(남·북촌)의 영기를 중심으로 영산 다다르기 장단이나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기굿을 한판 벌린다. 이때 좌상은 풀의 분량이 많고 적음을 가려내기 위해, 풀지게를 일일이 점검한다. 좌상은 풀을 가장 많이 벤 초군에게는 장원상을 내리고, 가장 적게 벤 초군에게는 벌주 한 말을 내리게 한다. 그래서 풀을 제일 적게 벤 초군은 목말을 타고 부인에게 가 부인이 막걸리 한 말을 초군들에게 대접하게 한다. 좌상이 풀지게를 검사할 때 초군들은 서로 풀을 많이 베었다고 우긴다. 벌주를 얻어먹고 장원상을 탄 초군은 목마에 태워서 주위를 한 바퀴 돌게 하는데, 이때 모두들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리고 좌상이 "두레풀을 모두 모우세"하고 말하면, 초군들은 풀을 모두 모아 놓는다.
그리고 초군 중 한 사람이 "자! 우리 벌주도 얻어먹었으니 낫치기로 풀 따 묵기 해보까?"하고 말하고, 다른 초군들이 동의하면서 낫치기 놀이가 시작 된다.
낫치기 놀이(낫 던지기)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선을 긋고 낫 던지기를 하는 놀이인데 모두 한 번씩만 실시한다. 이 놀이를 '풀 따먹기'나 '꼬내 먹기' 등으로도 불렀다. 낫치기 규정은 낫 끝이나 낫 손잡이 나무를 잡고 공중으로 던지는데, 이때 낫의 끝이 땅에 꼽히게 되는 것과, 낫의 끝이 오른쪽으로 보게 되면 ‘에우’라 하고, 낫의 끝이 왼쪽을 보게 되면 ‘오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등위는 일등은 낫 끝이 땅에 꼽히는 것이고, 이등은 ‘에우’, 삼등은 ‘오리’였다. 이 놀이에서 이긴 편의 초군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풀을 바지기에 모두 담고, 진편의 초군들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새로운 놀이를 제안한다.
"낫치기는 우리가 졌지만 다음에는 공치기를 하여 판가름 내어 보까?" 하고 진편의 초군 중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한다. 이 제안을 이긴 편의 초군들은 처음에는 응하지 않다가 못이기는 듯이 슬그머니 승낙을 함으로써 새로운 놀이가 시작된다.
새로운 놀이인 공치기 놀이는 남촌과 북촌의 대표가 가위 바위 보를 하여 이긴 사람이 공을 잡고 자기편이 공을 치기 유리하도록 자기 편 앞에 놓는다. 공을 놓는 즉시 초군들은 공치기를 하는데, 이때 구호는 "울리공, 울리공,.."이라고 같이 외친다. 공치기 놀이는 공이 목적 지점에 들어가는 편이 이긴다. 공치기에 이긴 편은 흥겨워하면서 풀을 모두 가져 갈 수 있고, 진편은 공연히 트집을 잡으며 실랑이를 벌린다.
이때 좌상이 나서며, "남촌 북촌 초군들아! 이러지 말고 우리 같이 두레풀을 비었으니 퇴비거름을 함께 만들어서 고루 나누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노?"하면서 두 진영의 화해를 주제한다. 초군들 대부분은 그러자고 대답하지만, 몇몇 초군은 계속 실랑이를 벌리는 등 소란을 피우다가 못 이기는 듯이 좌상의 설득에 굴복한다.
그리고 모든 초군들이 풀을 한군데 모으고 퇴비거름을 만드는 시늉을 한다. 풀을 모으고 밟고 똥오줌을 주는 시늉을 하는데, 이때 노래 가락도 부르고 탁주도 마시고, 담배도 피우며 잠깐 쉬기도 한다.
첫째 마당은 이렇게 소박한 놀이를 통하여 초군들의 고달픈 시름을 풀어내고, 궁극적으로는 남촌과 북촌이 서로 단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둘째 마당: 나무꾼 일노래]
바자리 없는 맨 지게에 까꾸리(갈퀴)를 꽂고, 질빵을 꽉 달아맨 초군들과 물구리나무를 할 초군들은 낫을 꽂고 지게 목발을 앞으로 눕혀 지고 간다. 그리고 지게 목발 장단을 치면서 나무꾼 일 노래를 부른다. 나무꾼 일 노래는 지정된 곡이 없고 그저 초군들의 고달프고 한스러운 소리로 나무 일의 고달픔을 풀어보는 노래였다.
노래가 끝나면 초군 한 사람이 "우리 남촌· 북촌 갈라서 깔비 따묵기 어장치기 하까?"하고 제안한다. 다른 초군 한 명이 "깔꾸리가 엎어지면 묵기고, 뒤비지면 진다이"하면서 놀이의 방법을 설명한다. 이 놀이는 한 번에 깔비 한 장씩을 타 놓고 따먹기를 하는 것인데, 초군들은 남촌과 북촌으로 나누어 일렬로 서서 까꾸리 던지기를 한다. 까꾸리 던지기 결과에 따라 깔비나무를 몽땅 얻기도 하고 또 잃게 되기도 한다. 이 깔비나무꾼(초군) 놀이는 깔비나무로 장을 만들어 한 짐씩 지고 산에서 내려온 초군들이 똥뫼에서 서로 만나게 되어 잠깐 쉬는 동안에 하는 놀이였다.
이 둘째 마당에서 부르는 나무꾼 노래는 나무할 때의 고달픔을 달래주고, 생활의 애환을 풀어준다는 의의가 있다.
[셋째 마당: 배꾸마당 한판놀이]
좌상이 "남촌 북촌 초군들아, 우리 오늘같이 좋은 날에 묵은 시름, 묵은 근심 걱정, 묵은 감정, 묵은 액운 다 잊어버리고 동네 굿이나 벌려서 한마당 놀아보세" 하고 외치면 연이어 풍물이 울린다. 그리고 풍물꾼, 초군들, 동네 사람들 모두는 박 바가지를 띄운 술동이를 가운데 놓고 둘러선다.
상쇠의 선창에 따라 노래를 같이 부르던 사람들이 일제히 반절을 올린다. 풍물은 영산 다다래기 가락을 치고, 고시레를 한 다음 농주를 마시고 동네 사람들은 한데 어울린다.
이어 개인 장기자랑 놀이가 벌어지는데, 장기자랑 놀이에는 '북 놀이', '벅구춤 놀이', '농부춤 놀이', '지게 목발을 치면서 노래 가락 부르기', '들돌 들기 놀이', '엉덩춤 놀이', '고동 띄움', '병*신춤' 등이 있다. 이런 각종 개인 장기 자랑으로 흥겨운 한마당 판굿놀이를 벌리고, 윷놀이도 벌려서 흥을 한껏 고조 시킨다.
이어서 퇴장이 진행되는데, 퇴장할 때는 자연스럽게 모여 선 채로 사방으로 인사를 올리고, 기러기가 날아가듯이 두 팔을 벌리고 덩실덩실 흥겹게 춤추며 못내 아쉬운 듯이 서서히 퇴장한다.
이 셋째 마당은 동네사람들과 초군들이 서로 어울려 각자 가진 장기로 흥겹게 노는 한바탕 놀이로 서로의 사기를 진작시키며 협동 단결하는 마음을 보여준다.
■ 3. 진동낙화축제
마산시 진동면에서는 사월 초파일 즈음하여 매년 '진동낙화(落花)축제'를 연다. 그 기원은 1천 8백년 전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1936년 진동 보애정각 낙성식 때 3일간 축제를 벌이면서 "봉래산을 휘감는 낙화가 장관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문헌으로 전해오는 것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예전에는 사동 봉래산을 휘감는 낙화를 국도 양편의 수양버들에 연달아 엮어서 진동까지 이어지게 하였는데, 불꽃으로 수놓아 불야성 같은 야경은 별천지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또 고현 선착장 앞바다에서는 수 십 척의 배가 드문드문 돛대를 이어 연결시켜서 낙화야경은 그야말로 절경을 이루었다.
이렇게 절경을 이루던 진동 낙화 축제가 점차 사라져 가는 것을 우리 고장의 민속 문화를 지키겠다며 나선 진동 청년회의 노력에 의해 다시 재현 발굴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진동낙화축제는 마산의 대표적인 민속 행사로 큰 성황을 이루고 있다.
진동면 낙화의 특징은 화약 대신 느티나무(귀목)의 껍질을 태워 만든 숯가루와 사기가루를 섞어 한지에 말아 30cm 가량의 한지 막대를 태우는 것이다. 숯가루가 흘러내리면서 타는 불꽃과 사기 가루가 타면서 내는 파열음이 그 특색이라 하겠다. 불꽃은 대략 한 시간에서 한시간 반 정도를 타면서 낙화를 만든다.
진동의 낙화축제는 현재 마산 고현의 명물인 미더덕을 함께 소개하는 축제인 ‘진동불꽃낙화와 미더덕 축제’로 그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 4. 만날제
마산 만날제는 마산시 현동과 월영동의 경계에 위치한 만날고개에서 해마다 열리는 마산의 대표적인 민속행사이다. 특히 만날제는 만날고개에 얽힌 모녀간의 애틋한 상봉전설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인 만남과 그리움을 주제로 한 민속테마 축제이다. 만날고개는 예전에 처녀들이 시집을 가면 친구들을 만나기 어려웠으므로, 추석날을 기해 여러 지방에 흩어져 있던 친구들이 각각 음식을 해 와서, 이 고개에서 만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서로 정담을 나누었다는 이야기, 또 출가한 딸과 친정 어머니가 이 고개에서 만나 한 많은 사연들을 주고받으며 혈육의 정을 나누었다는 전설 등 만날고개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는 그 세월만큼 많고 애틋하다.
1987년부터 열린 이 행사는 먼저 만날고개 제단에서 마산의 번영과 시민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시작으로 개막된다. 행사기간에는 만날제 향연과 그네뛰기·널뛰기·윷놀이·시민 노래 부르기대회, 미인대회, 효부, 효녀상 수여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려 시민들이 한데 어울려 즐길 수 있게 된다.
만날제는 점차 사라져 가는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소개하는 의미 있는 민속 행사이다. 또한 1987년 개최 이래 20년 넘게 유지되어온 마산의 독특한 전통 예술혼이 살아 숨 쉬는 고품격 축제라 할 수 있다.
특히 2006년부터는 만날제를 추석 전 대표 민속축제로 육성하고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한가위 달 축제"라는 주제로 단위 축제로는 드물게 전야제를 도입하여 창작 국악뮤지컬을 주제 공연으로 한 다양한 장르의 격조 높은 공연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합포만의 수려한 자연 경관이 그림처럼 펼쳐지는 만날 공원은 마산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 잡게 되었다.
■ 5. 농청(農廳) 놀이
음력 7월 15일은 백중일인데, 이 날이 되면 마산시 봉암동에 있는 반룡산 어복곡에는 인근 각지에서 수 만명의 주민들이 모여들어 장관을 이루었다. 어복곡에는 상투바위· 상사암· 무지개 웅덤샘· 약수정 등 신령한 약수터로 이름난 곳이 많았다.
처음에 반룡산 어복곡에서 가족 단위로 산신제, 용왕제를 지내오다가 영험이 있다는 소문이 나자 차츰 이 모임의 양상이 달라져 민속놀이로 발전하게 된 것이 바로 ‘농청놀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농청놀이의 연원을 ‘두레’에서 찾기도 하는데, 두레는 원시 공동체에서 전래된 촌락 단위의 자치 조직으로서 마을의 경제, 군사, 노동 단체이며 공동체적 생산과 협동의 단체로서 그 의의를 가지고 있다.
마산의 농청놀이는 줄곧 전승되어 오다가, 일제 때인 1929년부터 중단되었다. 그러던 것을 1981년 마산의 구상훈이 주축이 되어 마산민속문화보존회를 결성해서 이 농청놀이를 복원하였다. 이어 1983년 경남지방무형문화재 6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1988년에는 제 2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민속놀이 분야의 문공부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마산농청놀이의 놀이 개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농청놀이를 시작하기 전에 놀이의 모든 참여자가 자기편끼리 한곳에 모여 상투바위(놀이를 할 때 기를 꽂는 곳)에서 기제를 올린다. 농청 앞에 풍물패와 기잡이가 대기를 메고 나와 자리를 잡는다. 농청대기에는 ‘구강농청’, ‘봉청농청’이라는 글씨가 쓰여져 있고, “영차 영차” 소리를 지르며 깃대를 세우고 풍물을 울리면서 농청놀이가 시작된다.
깃대 앞에 멍석을 깔고, 명태, 밀떡, 꼼배기(밀, 보리 볶은 것)를 제수로 놓고, 좌상이 농주를 올리고 배례를 한다. 이때 풍물패의 신호에 따라 소기잡이는 깃발을 숙이고 농청원(農廳員)들은 엎드려 재배를 한다. 배례가 끝나면 풍물에 맞춰 ‘덕석몰이’를 하며 대기 밑으로 몰려든다. 덕석몰이는 처음에는 새가 모이를 쪼듯 기세를 올려 함성을 지르며 모여들었다가 서서히 대열을 풀며 상투바위로 향하게 된다.
[첫째마당: 기싸움]
구강농청패와 봉청농청패는 각각 죽고동을 선두로 풍물패가 뒤따르고 다음에 장정들이 호위하는 농청대기가 서고, 들메에 좌상이 올라 앉아 총지위를 한다. 그 뒤에 남자들은 기구와 음식을 실은 지게를 지고 아낙들은 질그릇을 이고 풍물을 울리며 일대 행렬을 이룬다.
행진을 하다가 딴 농청의 행진과 만나면 각기 죽고동을 울린다. 좌상이 장죽을 휘두르며 고함을 질러 호령을 한다. 농청원들은 대기에 몰려와서 한 패는 자기의 농청기를 둘러싸서 농청기를 지키고, 한 패는 상대편의 대기를 꺾는 기세로 진을 친다.
양편 모두 앞뒤로 원을 이루며 빙빙 돌다가 죽고동이 울리면 일제히 함성을 지른다. 그리고 공격대는 상대편 대기를 향해 돌풍같이 몰려가서 대기를 지키는 패와 격동하여 난장판을 이룬다. 공격대가 깃대를 타고 올라가다가 바지가 잡히면 하반신이 드러나게 되니 바지가 벗겨지지 않게 움켜지다가 떨어지기도 하고, 저고리가 잡혀 상체가 벗겨지기도 한다. 이런 모습으로 달려들고 막고 하는 일대 난투극이 벌어진다. 소기패와 아낙들도 자기편을 응원하기 위해 깃발을 흔들면서 고함을 지르며 대기 주위를 돈다.
이렇게 싸우다가 한 쪽의 깃대가 기울기 시작하여 넘어지고, 결국 깃발이 풀어지게 되면 그 편이 패배하게 된다. 이긴 편은 환호성을 울리고 밀대 방석을 흔들며 상투 바위 앞으로 달려가 대기를 바위에 꽂는다. 진편은 땅을 치고 통탄하다가 이긴 편 풍물패의 권유에 따라 넘어진 대기를 수습하여 바위 하단에 꽂는다. 이때 대기 밑에 12개의 소기를 꽂는 것은 대기를 중심으로 화합함을 뜻하는 것이다.
[둘째 마당 :축원]
농청원들이 메고 온 밀대 방석을 상투 바위에 깔고, 아낙들이 이고 온 음식(술, 밀떡, 꼼배기 등)을 차려 놓고 일제히 엎드려 소원 성취를 비는 기도문을 왼다. 이 기도문을 성신선고라 한다.
이 때 상투 바위에 축원하는 모습은 다양한 모습을 보이는데, 어떤 이는 종이에 불을 붙여 손으로 떠받들어 날려 보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병든 노모를 업고 나와 기도를 올리기도 하며, 몸이 불편한 이들도 와서 정성껏 합장 배례를 한다.
[셋째마당: 흥치와 회향]
농청원들은 술과 음식을 실컷 먹고 마시고 나면 양 농청 간에 여러 가지 경기와 놀이를 한다. 놀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즉흥적으로 할 수 있는 종목들이다. 태껸이나 서로 팔을 붙잡고 당기는 식으로 힘을 겨루기도 한다. 쌍방의 풍물이 나와 장기자랑도 하며 농부춤을 비롯하여 갖가지 춤으로 즐기기도 한다.
제일 인기가 있는 놀이는 씨름이었는데, 씨름으로 상머슴을 뽑는 일을 하였다. 쌍방에서 선발된 두 명의 장사가 나와 판을 벌여 이긴 장사가 상머슴이 되는데, 나락섬을 상품으로 주는 한 편 작두말을 태우고 좌상과 농군들이 소리를 지르며 덩실덩실 덧배기 춤을 추며 즐겼다. 백중이 머슴날이라는 것을 이런 놀이에서도 맛볼 수 있다.
각 농청 별로 무리를 지어 회동하며 춤을 추다가 쌍방이 한데 어울려 판굿을 하며 ‘쾌지나 칭칭 나네’를 부르며 상투 바위 앞에 모여 한바탕 놀다가 고별인사를 한다.
마산농청놀이는 오랜 전통을 가진 농청의 모습을 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특히 기싸움의 유풍은 우리나라 서민들의 기상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상투 바위에 대한 속신도 민간 신앙의 한 형태로 그 독특한 양상을 엿볼 수 있다. 또 마지막 판굿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놀이와 가락과 춤은 순수한 농민의 생활상을 투명하게 표출하고 있으며, 쌍방의 힘과 권위를 위해서는 힘을 다하여 싸우다가도 승패가 가려진 다음에는 회동하여 즐기는 농민의 인정미를 느낄 수 있다.
■ 6. 문창제 놀이
지방무형 문화재 제 5호로 지정되어 있는 문창제 놀이는 1606년 창원시 동정동에서 태어난 황시헌 선생의 충절심을 근간으로 하여 이루어진 놀이이다.
인조 14년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 20만이 침입하여 당시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남한산성 주위에 진을 쳐 인조대왕의 항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황시헌 선생은 창원 부사 백선남과 함께 다수의 의병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가던 도중 지금의 경기도 관주군 쌍령에서 적의 기습을 받고 31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하였다.
그 후 창원대도호부의 역대 부사들이 백성들과 함께 공의 비각과 제형을 올리고 그 충의의 얼을 추모하는 각종 행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이 행사가 사라지게 되었는데, 이것을 마산시 산호동에 거주하는 정경수가 창원노인회의 협조를 얻어 당시 놀이 형태을 더듬어 4과장으로 복원하여 재현하였다.
이 창원의 문창제를 마산의 놀이로 기재할 수 있는 것은 이 행사가 치뤄지던 당시는 마산, 창원의 지역 개념이 없이 모두 한 울타리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행사의 재현을 마산 산호동의 정경수가 했다는 점도 이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문창제의 각 과정별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제1 과장: 제향(祭享)]
우집사 ‧ 좌집사가 양쪽으로 서서 먼저 절을 하고 나면 징과 북이 울리고, 초헌관이 들어서서 분향하고 잔을 올리고 배례한다. 그 뒤에 아헌관 ‧ 종헌관도 앞과 동일하게 제향을 올린다. 이것은 종교적 이념의 바탕에서 오는 우리 민족의 숭조사상(崇祖思想)으로 지극한 효성심과 충성심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제 2과장: 추도무(追悼舞)]
10여명의 고녀(鼓女)들이 소복 차림으로 한삼을 끼고 황시헌의 비각 앞에 나란히 엎드려 배례하고 일어서면서 한삼을 뿌린다. 그리고 음율과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장단이 끝나면 춤도 끝난다. 그리고 창(唱)에 따라 원을 그리면서 합창하다가 창이 끝나면 춤도 끝난다. 이 추도무는 원한 맺힌 황시헌 공의 넋을 위로하고 명복을 빌며 추도하기 위한 것이다.
[제 3과장: 군노(軍奴)놀이]
창원 부사 황공 ‧ 관병 ‧ 의병과 청장(淸將) ‧ 청병(淸兵)들이 함께 쫓아 나와 다 같이 어울려 패랭이 춤을 추다가 엇갈려 관병을 한 곳에 몰아넣고 빙빙 돈다. 이어 부사 ‧ 황공이 죽고 관병 ‧ 의병이 모두 죽으면 또 한 무리의 의병이 나와 돌멩이와 몽둥이로 청병을 쫓아내고 땅을 치며 울다가 부사와 황공을 업고 나간다.
이 군노(軍奴)놀이는 부사의 시체를 감싸며 최후를 마치는 공의 장렬한 죽음과 우리 민족의 강직성과 정의감을 형상화한 것이다.
[제 4과장: 매귀굿]
꽹과리‧ 징 ‧ 북‧ 장구를 울리고 백성들은 음율에 맞추어 춤을 추다가 공의 비각 앞에 이르면 저마다 명복을 비는 절을 한다. 또 일어서서 빙빙 돌며 춤을 추다가 상쇠가 성진선고(星辰先考)를 하면 일제히 손을 들어 환호를 올린다.
이 매구굿은 비각 앞에서 백성들이 저마다 집안의 태평과 자손의 창성, 그리고 풍농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종교의식이 강한 우리 민족의 순박성과 후대의 영원한 번영과 발전에 대한 기원을 엿볼 수 있다.
■ 7. 성신대제
성신제는 “성신이란 명칭이 문자 그대로 뱃사람들이 귀항할 때 풍랑이 불면, 별이 희미하게 흐려져 항해가 어려운 데 이것은 등대가 없던 상고시대부터 고기잡이 뱃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는데, ‘별’에 기원하는 풍습이 풍부, 안택, 고기 장사가 잘 되기 등에까지 기복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전한다. 그러므로 성신이 마산 어민의 바다 항로를 밝혀주는 별에서 후대에는 어민에게 풍어를 안겨주는 성격으로 바뀌었으며, 마산 어민 전체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기 위해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낸 것이 성신제라고 할 수 있다.
성신제는 일제시대까지 해마다 제사를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성신을 모셔 놓은 사당이 도로가에 있었다고 전해지며, 성신제도 상당과 하당제의 형태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상당에서 지내는 제의는 다른 지역의 제의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엄숙히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때의 상당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산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주에 의해 경건한 분위기에서 유교적 제의가 이루어진 후 대동 축제의 성격을 띠며 모든 마산 어민이 참여할 수 있는 하당제, 즉 거리제가 치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하당제는 무당을 불러 행해졌으며, 마산 어민이 모두 동참하는 대동축제로서의 기능을 하였다.
결국, 성신대제는 그 옛날 마산지역의 당제로 여겨진다. 성신은 바다를 연하여 삶을 꾸려 나갔던 우리 마산 사람의 삶과 직결되는 마산 지역민의 수호신이라 할 수 있다. 이 별신을 모시고 제를 지냄으로써 우리 선조들은 그들의 삶의 평안과 풍요를 빌었고 그것은 마산 주민의 대동 축제였다.
무당의 주도로 마산 시민 전체가 참여할 수 있는 거리제에 관련된 자료는 1987년 성신제를 복원하면서 함께 복원된 마산 문화원의 자료가 전해진다. 그 자료에 따르면 놀이 마당은 크게 세 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마당: 축원]
장정(어부) 10여명이 ‘어기영차’ 소리를 지르며 신목을 메고 들어와서 나무 끝에 방울 5개를 달고 축대 위에 세운다. 이어서 성신대제기를 앞세우고 마을 대표 1명과 제관 6명, 무당 3명, 걸립패 2-3명과 어구를 맨 어부 10여명이 신목을 가지고 온 장정과 어울린다.
미리 차려놓은 제단 앞에 마을 대표가 유건(儒巾), 도포(道袍) 차림으로 서고 마을의 두 집사가 향을 사르고 촛불을 켜서 헌작(獻酌), 재배(再拜), 고천독축(告天讀祝)한다.
축문을 읽고 다시 재배할 때 일제히 절한다. 이 때 걸립패는 제단 주위를 둘러 서 있고 고천독축을 읽고 나서 제관의 오른 쪽에 다 같이 서 있다가 무당이 재배하면 다 같이 절한다. 그리고 무당은 굿을 시작하는데, 이때 걸립패는 방해가 안 되게 낮은 소리로 풍물을 치며 화합한다. 소지를 올리면 굿이 끝난다. 이어 무당이 퇴장하고 서로 강복을 축하하며 걸립패가 한판 놀아댄다. 상쇠의 신호로 가무음곡이 그치면 모든 사람이 퇴장한다.
[둘째마당: 풍어놀이(꼬시락잡이)]
축원마당을 마친 뒤 정렬하고 잠깐 풍물이 울린다. 상쇠가 요리조리 살피면서 풍물소리를 딱 그치게 하고 “꼬시락 떼다”라고 외친다. 그러면 모두 같이 “꼬시락 떼다”를 합창하면서 풍물을 요란하게 울린다.
이때 어구를 맨 어부가 무대를 세 바퀴 돌면서 “저기다” 하면서 무대 한 모퉁이에 늘어서서 줄 끝을 잡고 이리저리 꼬시락 떼를 얕은 물 속으로 모는 동작을 한다. 걸립패는 낮은 소리로 풍물을 울리고 마을 사람들은 무대 앞에서 흥겹게 춤을 춘다. 몰아붙인 꼬시락 떼를 크게 함성을 지르면서 원형으로 포위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릇으로 꼬시락을 건져 올린다. ‘어기영차 어기영차’ 하면서 어부와 마을 사람들이 흥겹게 노동요를 부른다. 이때 멀리 나갔던 배가 풍어기를 펄럭이며 들어온다. 모두가 손짓하며 “저기 배가 들어온다”고 외친다. 이때 걸립패는 가장 요란하게 풍물을 울리며 절정을 이룬다.
고기잡이배도 만선을 이루어 무사히 마을로 돌아왔고 마을 사람들은 꼬시락을 많이 잡은 기쁨으로 어쩔 줄 모른다. 어부는 어구를 어깨에 메고 마을 사람들은 잡은 꼬시락 함지를 머리에 이고 걸립패를 앞세우고 “꼬시락 사이소!”를 외치면서 세 바퀴 돌고 퇴장한다.
[셋째 마당: 선창 걸립패]
축원도 드렸고 고기도 많이 잡았으니 이제는 복을 마을 구석구석에 나누어 달라는 뜻과 소원을 안고 걸립패와 더불어 신나게 논다.
걸립패는 어부를 따라 무대를 세 바퀴 돌고 동쪽을 향해 관람객에게 인사를 한다. “선창 걸립패요, 복 많이 받으소서” 절을 한 다음 성주풀이 조왕말기로 한 판 논다. 서쪽을 향하고 남쪽을 향하고 북쪽을 향하면서 똑 같은 장면을 재연한다. 이러한 연속 장면을 재연하면서 마을로 도는데 처음 봉암에서 시작하여 산호동, 그리고 창동으로 갔다가 월영동을 참배하고 까치날을 둘러서 가포까지 가서 우렁찬 함성을 내지른다. 다시 성주풀이를 하다가 한바탕 신명을 풀며 상쇠의 지휘에 따라 풍물을 치면서 그야말로 질서정연하게 행사를 마친다.
마산문화원에서 추진하여 여러 가지 성과물을 기록한 성신대제 연구팀의 『마산 성신대제 연구』에 의하면, 마산의 성신제는 3월 중에 별신제의 형태로 치러졌으며, 성신제가 끝난 뒤에는 오광대 놀이가 있었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이때 오광대 놀이는 마산 어민이 함께 즐기고 어울려 마을의 화함과 안녕을 기원하는 대동 축제의 성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마산지방의 오광대는 성신제 뒤에만 열렸다고 하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성신제가 가지는 특별함, 즉 성신제가 얼마나 중요한 제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성신대제는 가장 오랫동안 이어온 해양도시 마산의 습속이며, 지역민이 총동원되어 행했던 축제의 마당이었다. 이러한 행사가 시대 조류와 산업화로 인해 그 행사가 중단되는 위기에 처해졌었다. 그러나 그 맥을 이어가려는 노력으로 이루어진 1903년부터 1928년까지의 개최, 1954년의 행사, 그리고 1980년대 들어 성신대제 복원을 위한 사업과 축제의 개최는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본격적인 원형 발굴과 유지를 위해 2006년 10월 마산성신대제복원추진위원회를 개최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학술연구발표회와 성신대제 연구의 서적 발간, 원형을 형상화한 기획 공연 등의 행사는 매우 알찬 결실이라 할 수 있다.
■ 8. 마산 오광대(五廣大)
오광대는 경남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가면극으로, 처음에는 합천(陜川) 초계(草溪) 밤마리(栗旨里)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한다. 밤마리는 지리적으로 경남의 중심지인 동시에 낙동강 중류에 위치한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상인들의 후원으로 오광대놀이가 활발하게 연행되었다. 따라서 밤마리 장터에서 관람한 다른 지방 사람들이 자기 지방에 가서 오광대놀이를 재연하면서 이것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대본이 채록된 것은 진주· 마산· 가산 등이다. 오광대란 명칭은 다섯 광대가 나와 오방(五方)의 잡귀를 물리친다는 뜻이다. 연희의 시기는 처음에는 음력 정월 대보름 밤을 중심으로 연행되었으나, 나중에는 3월 보름, 4월 초 봄놀이, 9월의 단풍놀이에도 오락적 연희로 연행되었다.
마산 오광대의 자료는 최상수가 1963년 『경상남도지(慶尙南道誌)』하권에 채록한「야유·오광대 가면극(野遊·五廣大 假面劇)」에 실린 자료가 유일한데, 이 자료에 의하면 마산 오광대는 제 일장 - 오방신장무(五方神將舞) 과장(科場), 제 이장 - 상좌(上佐) 노장(老長) 중 과장, 제 삼장 - 문둥이 과장, 제 사장 - 양반(兩班) 과장, 제 오장 - 영노 과장, 제 육장 - 할미·영감 과장, 제 칠장- 사자무(獅子舞) 과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광대는 대체로 앞과 뒤에 춤이 위주인 제의적(祭儀的) 놀이 단위들이 위치하고, 그 가운데 부분에 대사와 동작이 위주인 연극적 놀이 단위들이 위치하는 것으로 구조화 되어 있다. 이런 구조에서 마산 오광대 놀이를 과장별 춤으로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오방신장춤 - 오방 신장춤 놀이는 들놀음에는 없고 오광대에만 있다. 오방신장춤은 첫 과장으로 오광대란 말이 여기에서 연유되었다고 할 정도로 주요한 의미를 가진 과장이다. 이 과장에서는 오방신장(五方神將)들, 즉 중앙(中央) 황제장군(養帝將軍)· 동방(東方) 청제장군(靑帝將軍)· 서방(西方) 백제장군(白帝將軍)· 북방(北方) 흑제장군(黑帝將軍)· 남방(南方) 적제장군(赤帝將軍)들이 각각 등장하여 각 방위(方位)에서 말없이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이 과장은 극적 전개가 없는 의식무 과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놀이는 굿의 첫 머리에 부정 거리를 없애는 것처럼 오방신장무(五方神將舞)를 추어서 놀이 공간을 깨끗이 하고 놀이를 무사히 마치기를 기원하는 의도의 춤이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 중춤 -
이 놀이도 들놀음에는 없고 오광대에만 있는 과장이다. 최상수가 채록한 마산 오광대 자료에 의하면 이 과장에서 중과 상좌가 춤을 추면서 부르는 중타령이 있는데, 마산오광대의 중춤은 다른 오광대에서 보이는 파계승에 대한 풍자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것으로 보아 이 과장도 의식무에 가까운 형태라고 할 것이다. 특히 마산 오광대에서 행해지는 중타령은 무가(巫歌)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 문둥이춤 -
이 춤은 문둥이의 골수에 맺힌 한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며, 다른 지방 가면극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경남지방 특유의 과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공연될 때는 관객에게 웃음을 던져주는 과장으로 그려진다. 즉, 일그러진 괴기(怪奇)한 가면을 쓰고 이리 저리 춤을 추는 문둥이 춤은 구경꾼들에게 큰 웃음을 주는 역할을 한다.
- 말뚝이·양반 춤 -
이 과장은 모든 오광대와 들놀음에서 놀이되는 과장으로 대개 양반 과장으로 부른다. 이 과장은 오광대와 들놀음의 중심적인 과장이므로 대사도 많고 공연시간도 길다. 이 과장에 등장하는 양반들은 가면극에 따라 3인 내지 7인이 등장하지만 원양반 혹은 수양반이라는 양반이 극의 전개를 주도하고, 이 외의 양반들은 부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 영노·양반 춤 -
영노의 상대역이 황제장군일 경우에는 영노·오방신장무라 부르고, 영노의 상대역이 양반일 경우에는 영노·양반 놀이라 한다. 영노는 경남지방 가면극 이외에 용례가 보이지 않아 정확히 말할 수 없으나 대사를 통하여, "무엇이든지 잡아먹는 하늘에 사는 무서운 상상의 동물"로 여겨진다. 이 영노가 호드기를 입에 대고 '비비' 소리를 내면서 양반을 위협하므로 '비비' 혹은 '비비새'라 부르기도 한다. 특히 양반을 잡아먹는다는 점에서 볼 때 악을 징벌하는 신수(神獸)라 할 수 있다.
경남지방 가면극의 영노·양반 놀이과장은 그 구성과 내용이 서로 비슷한 면이 많다. 이 과장에서 거드름을 피우던 양반이 영노를 만나 혼이 나고 마침내는 잡아먹히고 만다. 이 과장은 이러한 놀이를 통하여 양반의 허상을 풍자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 놀이는 앞 과장인 말뚝이 양반 과장과 깊은 연관을 갖게 된다. 즉, 말뚝이에게 망신을 당하고 용서를 구한 양반이 결국은 영노에게 살해당함으로써 탈놀이는 양반 풍자의 절정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 할미·영감 춤 -
이 놀이는 경남지방의 모든 가면극에 들어있는 과장이다. 이 과장은 할미의 익살스런 춤과 행위, 첩의 고운 맵시의 춤, 영감의 거드름 등에 극의 관심이 집중된다. 이 과장은 춤과 행위 위주의 과장이므로 각 가면극마다 대사의 변화가 심하다. 특히 이 과장은 영감의 부도덕한 생활에 대한 비판을 희극적으로 표현한 과장이라 할 수 있다. 대체로 경남지방의 오광대에서는 영감이 첩과 놀아나 첩이 아이를 낳게 되자, 할미와 첩이 서로 아이를 어르려다가 첩이 할미를 밀어 할미가 죽게 된다. 그러자 영감이 이를 애통해 하고 장례를 치루는 내용으로 전개된다.
- 사자춤 -
이 과장은 오광대의 마지막 과장이다. 마산오광대 사자춤은 대체로 사자가 춤을 추다가 담비(혹은 범)를 잡아먹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벽사진경(壁邪進慶)의 가장 원초적인 의식무라 할 수 있다 특히 사자와 대립관계에 있는 담비를 등장시켜 보다 극적으로 발전된 형태라 할 수 있다. 민간에서는 호랑이도 무서운 맹수지만 "호랑이를 잡아먹는 담비"란 말도 있듯이 담비는 더 무서운 짐승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짐승들을 사자가 잡아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사자의 위력을 높여주는 것으로, 이 과장에 등장하는 사자는 잡귀나 잡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진 짐승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즉, 서민을 핍박하던 양반이 말뚝이에게 조롱을 당하고 마침내 영노의 밥이 되듯이, 범 역시 영노와 같은 기능을 가진 사자에게 살해된다는 것이다. 대체로 사자춤은 대사가 없이 춤만으로 이루어진다.
■ 8. 진동 큰줄다리기
진동 큰줄다리기는 대략 1800년을 이어 내려 왔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 놀이는 뱃사람들이 닷줄을 이용한 놀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하고 있는데, 그 규모가 너무 커 한해씩 걸러서 하기도 했다. 정월대보름날 달맞이 행사와 같이 부락의 안녕과 태평을 빌고 풍년과 풍어를 소원하는 뜻에서 행하여졌다.
그러나 이 놀이가 1965년 이후 진행되지 않던 것을 1992년 농업 경영인들이 한마음으로 모여 풍년을 빌기 위한 행사로 재발굴 하여 정월대보름 달맞이행사와 같이 제1회 진동큰줄다리기 행사를 개최하여 지금까지 성황리에 유지되고 있다.
초창기에는 줄에 대한 제를 올리고 큰줄다리기만을 하던 것이, 해가 변하는 동안 사람들의 참여도가 높아짐에 따라 부대행사를 기획하여 1부 행사로 당산제 및 8의사 창의탑 참배, 각설이 및 민요만담대회 등을 실시했고, 2부 행사로 비녀쇠 시가행진과 큰줄다리기 제례를 하고 본격적인 큰줄다리기를 하였다. 이후 각설이 공연과 달집태우기 및 풍물놀이로 행사를 마감했다.
옛날에 줄을 제작할 때에는 이 줄다리기의 줄이 닷줄을 확대하여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뱃사람들이 주로 줄을 만드는 감독을 했다. 짚은 여러 곳에서 수거해 수 백 동씩 쌓아놓고 물을 퍼 적시면서 주민들이 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여러 날 동안 줄을 만들고 줄을 지켰다.
줄다리기는 편을 나누어서 하는데, 진동의 동서를 구분하여 서촌으로부터 진북면, 진전면, 진동면, 사동, 죽전, 고현 등지가 서부쪽(숫줄) 편이고 광암, 다구, 도만, 구산면 마전 등지가 동부(암줄)편이 되었다. 줄은 3회에 걸쳐 당기게 되는데 인원수는 무제한이고 어느 쪽이거나 무슨 수를 써서든지 오직 사람이 많이 붙을 수 있으면 되는 것으로써 과거에는 큰 줄에 3~4천명이 당긴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줄을 당겨 그 쪽으로 줄이 당겨진 편이 이긴 것으로 승부를 판가름했는데 숫줄이 지면 이것을 암줄이 살고 숫줄이 죽었다고 표현하여 다음 날 서부 편에서 상여를 만들고 여자를 상주로 해서 작대기를 집고 울고 곡했다. 또 풍악을 울려 줄에 가서 서방이 죽어 과부가 되었음을 고하며 술을 부어 제를 지냈다. 그리고 진동 시내를 누비며 풍악을 울리면서 풍년과 안녕을 빌었다고 전한다. 현재는 이런 풍속 없이 줄다리기가 끝나면 줄다리기 했던 줄을 가져가서 태우면 복을 받는다고 하여 줄다리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줄을 풀어가고, 마지막으로 달집태우기를 하면서 소원을 비는 것으로 행사를 마무리한다.
■ 9. 민속 경연대회
① 그네뛰기
그네를 마산에서는 구네, 군대, 군듸, 굴리, 그내, 근대, 근데, 술래, 군디 등으로 부르고 있다. 마산 지방의 그네뛰기는 진북면 지산천 숲의 그네뛰기가 유명한데, 900여년 전 진북면 지산천변의 숲에서 시작된 추천놀이는 1953년에 제 1회 경남 추천대회까지 개최할 정도의 행사로 발전했다.
그네뛰기는 씨름과 더불어 단오놀이의 주요 종목으로 굳어져서 전국적으로 즐기는 놀이이다. 그러나 단오절의 세시적 풍습이 쇠퇴하면서 추석 때나 각종 축제 때에 그네뛰기 대회를 여는 곳이 많아지게 되었다. 마산의 가고파 축제나 만날제 축제 행사에 가장 인기를 끄는 종목 중에 하나도 바로 그네뛰기이다.
그네뛰기 경기의 승부는 그네의 발끝이 높이 올라간 사람이 이기는 것인데 그네의 끝이 앞으로 올라가는 자리에 높이를 측정하는 장대를 세우거나 그 뒤에 방울을 달아 놓고 이것을 발로 차서 소리를 내게 하는 방법이 있다. 또 그네 발판에 가느다란 줄을 매달아 이 줄로써 그네가 오른 길이를 측정하는 방법도 있다.
그네는 그 뛰는 방법도 다양하지만 그네 뛰는 모습이 특히 아름다워 시문이나 그림에 자주 묘사되기도 한다. 그네는 혼자 뛰기도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뛰는 쌍그네도 있다. 또 그네를 뛸 때 여자들은 대부분 다채로운 한복 차림으로 하는데 그 모습 자체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여자들에게 더없는 운동이 되기도 한다.
② 씨름
씨름은 우리나라 전 지역의 놀이이기 때문에 우리 마산만의 민속놀이로 생각할 수는 없으나 마산 지방을 비롯한 경남 지방에 특히 성행하는 놀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 점은 또한 마산에서 역대로 이만기를 비롯한 씨름 장사가 많이 나오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씨름은 본래 단오절의 놀이로서 유래되고 있으나 마산 지방을 중심으로 한 경남 일원에서는 단오보다 추석에 씨름을 하는 곳이 많다. 주로 소년이나 청년 남자들이 하는 놀이지만, 여자도 그들끼리 씨름대회를 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씨름은 옛날 풍속과는 달리 경기 운영 방식을 공식화하여 경기를 하고 있다. 즉 1955년 이후에는 선수의 체중에 따라 체급을 한정하고, 시합장의 크기도 규정으로 정하고 있다.
우리 마산의 씨름은 김해 지방의 씨름이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김해는 낙동강 하류의 모래 사장이 좋아 씨름이 성했고 따라서 씨름 기술, 경기 방법이 많이 발달해 왔기 때문이다. 복장은 옛날 씨름에서는 띠를 주로 사용해 왔지만 지금은 샅바를 사용하고 있다. 샅바의 굵기, 천의 종류는 씨름 협회의 규정으로 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