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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의 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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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마산문화원 댓글 0건 조회 228회 작성일 24-06-07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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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의 지명

마산(馬山)이라는 지명은 여러 설이 있으나 조창과 두척산에서 유래한 것이 설득력과 역사성이 있어 보인다. 고려초 성종대 전국 12곳에 조창을 설치하면서 석두창이라는 조창을 두었다. 마산의 주산인 무학산의 옛이름은 두척산이다. 이는 조창과 관련이 있는 산이름으로 보인다. 두척이란 쌀을 재는 말의 의미인 '두(斗)'에, 자 '척(尺)'으로서, '쌀을 재는 자', 즉 말통이다. '쌀의 높이를 재는 산'으로 조창과 관계된 이름이다. '두척'의 '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뜻을 다르지만 소리를 따라서 말 '마(馬)'로 옮긴 것이 마산으로 표기된 것이다. 즉 두척산에서 마산의 이름이 유래되었다. 두척마을, 마재고개 등의 지명에서도 확인된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언제부터 불려졌는지 그 정확한 연대가 기록으로 남겨져 있지 않다. 그러나 1481년 <동국여지승람>에서 고대로부터 조선초까지 일반화된 내용을 정리하면서 '마산'으로 지명을 표기하고 있는 방증자료로 볼 때 고려시대부터 일반적으로 불려졌던 역사성을 지닌 이름이 바로 마산이라는 지명인 것으로 이해된다.


■ 만날고개
월영동산에서 해발 180m고지를 넘어 예곡동 감천골로 통하는 오솔길에 위치한 "만날고개"는 옛부터 많은 사람이 다니는 고개이다. 고려 말년, 마산포 양반 이씨가문의 효녀가 감천골 진사댁으로 시집을 가서 불구남편을 극진히 모셨으나 자기의 불구를 한탄하며 자결하니 친정에 가지 못하고 몇해를 보내다 친정어머니와 동생을 이 고개에서 만나 정담을 나누었다 하여 "만날고개"라 한다.


■ 용마산
옛날 부부가 자식을 얻기 위해 산 위 큰 바위에 공을 드려 자식을 얻었으니 그 아이가 1주일도 안되어 선반위에 오르고 장수로 소문이 나서 관원이 추달하여 바위를 부수고 들어가 말을 타고 나오려는 장수를 죽였다 하여 "용마산"이라 한다.


■  갈마봉
가포동 서편에 솟아있는 산봉우리로 "목마른 말이 물을 찾는 형태"라 하여 "갈마봉"으로 불린다.


■ 대껄
월영대에서 동서로 뻗친 거리의 이름이며 "대껄"의 "대"는 "월영대"를, "껄"은 "거리"를 말한다.


■ 돝섬
월영동에서 동쪽 1km지점에 위치하는 돼지(돝)모양의 섬이다.


■ 불종거리
중성동, 오동동, 동성동의 갈림길에 있는 네거리인데 몇 십년 전에 이 곳에 불종대가 있었는데 불이 나거나 비상시에 불종대에 올라가 종을 쳐서 알리던 곳이다.


■ 성산동
옛날 마산이 벽촌일 때 지금의 동성동에 성산등이라는 조그만 등성이가 있었는데 여기가 성산 이씨의 본향지라 한다.


■ 쑥거리
지금의 창동거리를 말하며 옛날에 숲이 많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며 일명 "쑥거리"라고도 한다.


■ 멧등거리
부림동 청과시장터를 말하며 옛날에 이 곳에 묘가 많았다고 "멧등거리"라고 한다.


■ 구멍고개
교방동 뒷산 서원곡을 지나 신마산 댓거리로 빠지는 고개이다.


■ 통세밋절
구 한국은행 맞은편 길가에 옛날에 나무로 통짜듯 짜올려 만든 우물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 벅수껄


■ 장승거리
합포초등학교 정문에 가까운 도로변을 말하며 40여년 전까지도 이 곳에 나무장승이 서 있었다고 하여 "벅수껄" 또는 "장승거리"라고 한다.


■ 말굿
산호 정수장 아래쪽에 있는 깊은 논을 "큰 말굿"이라 했고, 산호동사무소 남서쪽의 우물과 낮은 곳을 "작은 말죽통"이라 했다. 임진왜란 때, 용마산성을 쌓은 왜군들이 군용보급 물자를 안전, 신속히 양육하기 위해 바다에서 산성 밑까지 배가 들어올 수 있는 운하를 팠던 자리가 메워져 그 모양을 딴 이름이다.


■ 문둥이고개
부치고개의 별명인데 해방후부터 15년간 나병환자 집단거주지였던 관계로 새로 생긴 이름이다.


■ 반내들
산호 정수장 북서쪽 일대의 들판으로 옛날 이 곳에 한약재인 반하풀이 많이 자생하였다 하여 이 이름이 붙었으며 일설에는 돈 없는 장돌뱅이가 들판에 자생한 반하를 캐서 대구 약령에 가서 팔아 한 몫보게 되었다는데서 생긴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반월들", "반야들", "반매기들"이라고도 한다.


■ 봉화재
마산시의 북쪽에 있는 재로 봉화대가 있기 때문에 "봉화재"라고 한다.


■ 배암골
회원동 남서쪽 두척산과 봉화산 사이의 골짜기이다.


■ 앵기밭골
회원동의 서편 두척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로 옛날 앵기닭(영계)이 울었다는데서 유래된 것이다.


■ 갈마산
석전동에서 북동쪽 1km지점에 있는 산인데, 그 모양이 마치 갈모같이 생겼다 하여 "갈마산"이라 불렀다 한다.


■ 구강장
옛날 마산의 중심이 이 곳이었기 때문에 종합시장처가 이 곳에 있었으며 함경도 명태배가 이 곳에 닿았다는 선창이 있었다.


■ 기와밭골
전해오는 말로는 봉암동이 있기 전의 옛날에 기와집만 짓고 사는 부자들이 많이 살았다 하며 옛날에 기와조각이 많이 나왔고 또한 밭으로 이용되기에 "기와밭골"이라 부른다.


■ 홍천
승무직골에 있는 절에 샘이 있었는데 이 샘터에 항상 무지개가 서기 때문에 샘이 붉게 보여서 "홍천"이라고 한다.


■ 內西안성리
옛부터 안심하고 피란하기에 더할 수 없는 좋은 자세를 가지고 있다 하여 "안성리"라 부른다.


■ 평성리
광활한 들녘에 동리가 형성되었다 하여 "평성"이라 부르게 되었고 1984년도에 안곡부락을 분동시키고 현존하고 있다.


■ 안곡
능선과 능선 사이에 작은 골을 이루고 있으며 안성천 물줄기에 펼쳐진 쉰마지기 들녘을 앞에 두고 남향을 향하여 이루어진 이 동리는 항상 편안하고 넉넉하기만 한 곳이라 하여 "안곡"이라 부른다.


■ 호계리
동리 앞 산기슭 국도변에 있는 범바위(虎石)의 이름 첫머리 "호"자와 광려천 내의 흐름에서 한자음 "계(溪)"자를 말미에 쓰게되어 "호계"라는 이름을 부르게 되었다.


■ 구미마을
안골에서 독(옹기종류)을 많이 생산하였다 하여 "독골"이라 칭하다가 "도덕동"이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해방을 전후하여 호계리 본동에서 구미마을을 바라보면 어언골 입구에 있는 작은 산봉우리와 승장 등으로 이어져 있는 마을 뒷산의 형태가 거북이 모양으로 보인다 하여 마을형성지점이 거북이 꼬리부분이라 하여 "구미"라 부르게 되었다.


■ 용담리
못 안에 촌락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연대미상의 저수지가 있었는데 이 곳 저수지에서 용이 하늘로 등천하였다 하여 "용담"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 수곡마을
동리 입구에 조성되어 있는 새 주막으로 동리를 이루고 있으며 용담리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어 있다가 1940년도에 분동이 되면서부터 본동의 동명이 "물이동(勿易洞)"으로 부르다가 "무리골"로 발음되면서 "수곡"으로 명명되었다.


■ 죽암마을
본동 바위위에 대나무가 자란다 하여 "대바구(대바위)"라 부르다가 "죽암(竹岩)"으로 명명되었다고 하며 지금도 동리 뒤 가장산 기슭에는 바위위에 대나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중리
본동은 1940년경 팽창할대로 팽창되어 본동을 죽암, 상동, 삼정, 옥정, 신평, 광천마을로 분동시키고 면의 중심부에 위치한 관계로 동명을 "중리"라 한다.


■ 감천리
동리 중심지에 언제부터인지 모를 샘물이 솟는 우물이 발견되어 동민의 식수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물맛이 뛰어나 인근 각지에 소문이 전해져 동명을 "감천"이라 하였다.


■ 구슬골
상, 하 옥동(구슬골)을 소의 먹이를 담는 나무죽통을 닮은 골짜기라 하여 "구시골"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구시골"이 "구슬골로 된 것은 우리말의 사투리를 표준말로 표시하는 과정에서 "구시골"이 "구슬골"로 표기됐다.